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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505
한자 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이칭/별칭 광주 민중 항쟁,5·18 민중 항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기훈

[정의]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영암군을 비롯한 전라남도의 시민들이 전라남도 광주시를 중심으로 벌인 민주화 운동.

[개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지금의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계엄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 운동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려 한 것에 맞선 대규모의 시민적 저항 운동이다. 특히 학생이나 지식인 등 일부 계층만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거의 모든 시민이 참여하여 민주적인 공동체로서 질서를 유지하며 진행한 민주화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자 유신 체제는 더는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나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봄 곳곳에서 분출하는 민주화의 요구를 강제로 봉쇄하고 권좌에 오르고자 하였다. 이들은 5월 17일 자정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서 군부 독재를 연장하려 하였다.

[경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5월 18일 아침 봉쇄된 전남 대학교 교문에서 계엄군과 학생들이 충돌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시내로 진출하여 민주화 요구 시위를 전개하였고 계엄군은 무차별 구타와 연행으로 대응하였다.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운동은 더욱 확대되었다. 5월 21일 전라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시민들이 무수히 쓰러지자 이에 맞서고자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하였다.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 끝에 계엄군은 도청에서 철수하고 광주시 외곽을 포위하였다. 도청을 접수한 시민들은 자치적으로 수습 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를 개최하면서 민주적 질서를 유지하였다.

한편, 이날 영암 지역에서는 시위대들이 광주시에서 버스에 타고 영암군 신북면을 거쳐 영암읍내로 와서 항쟁의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영암읍신북면의 청년들이 각각 항쟁에 참여하기로 하고 광주로 출발하였다. 일부는 광주에 도착하여 시민군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계엄군에 의해 진입이 차단당한 사람들은 광주 주변 지역에서 시위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5월 21일 시민군들이 영암 경찰서의 무기고를 탈취하였으며 영암읍신북면의 청년들도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광주 진입이 막히자 22일에는 영암군을 오가는 차량 행렬이 더욱 빈번해졌다. 시민군들이 영암군에서 군서면·학산면·미암면의 경찰 지서를 장악하였으며 나주군에서는 무기를 나누어 주고 광주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지역 주민들은 돈을 모아 현수막을 만들어 주거나 빵과 음료, 김밥 등을 시민군에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5월 22일 오후부터 영암에서는 무기 회수 등 수습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5월 23일 무렵 광주시가 외부와 한층 고립되면서 영암 지역의 시민군 활동도 크게 약화되었고 24일 오후부터는 시위 차량이 거의 사라졌다. 광주시의 외곽을 포위한 계엄군은 시민들의 어떠한 수습안도 거부하였고, 5월 27일 새벽이 되자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 진압군이 시내로 진입하여 저항하는 시민군을 유혈로 진압하고 광주를 장악하였다.

[결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간 중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과 발포, 광주에서의 철수와 포위, 도청 재진입 과정에서 수많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또 저항이 진압된 후 많은 사람이 연행되어 고문에 시달려야 하였다. 제5 공화국 정권은 이런 폭력과 유혈 위에 성립하였으나 그만큼 강력한 저항에 시달려야 하였다.

[의의와 평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은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는 여러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들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이런 세계사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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