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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서호 간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97
한자 靈岩西湖干拓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개 시기/일시 1949년연표보기 - 영암 서호 간척 제방 완공
종결 시기/일시 1961년연표보기 - 영암 서호 간척 완공
성격 간척 사업
관련 인물/단체 현준호|현영원

[정의]

1939년부터 1961년까지 전라남도 영암군의 서호면 성재리군서면 양장리 간 바다를 제방으로 막고 학파 농장을 만든 간척 사업.

[개설]

현준호(玄俊鎬)[1889~1950]는 1933년 영암군 미암면 춘동리 마을 간척 사업을 완공하고, 이어서 서호면 성재리군서면 양장리 간 1.2㎞의 갯벌을 막는 서호 간척 사업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현준호는 1939년 조선 총독부로부터 간척 사업 허가를 받아 내고, 조선 식산 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간척 공사를 시작하였다. 1949년 제방이 완공되자 총 900여 정보[약 892만㎡]의 농장이 만들어졌는데, 현준호는 아버지 현기봉(玄基奉)[1855~1924]의 호 학파((鶴坡)를 따서 학파 농장이라 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때의 기업인이자 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였던 현준호가 갯벌을 농지로 만들고자 시작하였다.

[경과]

제방은 1949년 완공되었고 현준호6·25 전쟁 중에 피살되었다. 이후의 간척 사업은 아들 현영원(玄永源) 현대 상선 사장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1961년 용·배수로 공사, 학파 저수지, 정지 공사 등이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학파 농장은 6·25 전쟁 기간을 빼고 총 19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학파 농장의 총면적은 892만㎡로, 개인 소유의 농장으로는 국내 최대였으며 실제 경작 면적은 600만여㎡에 이르렀다. 이에 따른 연간 수확량은 약 3만 가마에 달했다. 여기에 용수를 공급하는 학파 저수지는 면적 8만 5000㎡에 유효 저수량은 245만 3900㎥였다.

1962년부터는 소작료 3할에 인근 지역민들이 경작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간척 이전에 100여 호에 불과하였던 농가가 학파 농장이 완공된 이후에는 급증하여 무송 마을[‘무송’은 현준호의 호] 등 아홉 개 마을이 형성되었고 경작 인구는 1,100호 가구에 약 5,000여 명에 다다랐다.

[결과]

1988년 무렵, 소작인들은 소작료 거부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간척 당시 현준호가 간척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땅을 20년 후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1954년 아들에게 상속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정부가 1949년 농지 개혁법을 발표한 후 1차 간척 사업으로 영암군 미암면 춘동리에 만든 약 99만 1700㎡의 땅은 지가를 환산하여 경작자들에게 넘겼지만, 학파 농장 200여만 평[661만 1570여㎡]은 미개척지로 신고하여 양도를 피하였다고 주민들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학파 농장 소작 쟁의는 1994년 타결되어 800여 세대의 소작농들에게 땅을 평당 6,500원에 팔면서 마무리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기업인이 일제의 자본을 빌려 대규모 간척을 한 보기 드문 사례이며, 해방 후에도 민간인에 의하여 계속 정비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는 호남 지역 농지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으나 현대에 들어와 비로소 소작 쟁의가 해결되었을 정도로 오랜 기간 간척지 개발 주체와 지역민 간에 갈등을 빚어 온 사례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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