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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63
한자 倉津浦
분야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 창진 마을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980년 - 창진포 영산강 하굿둑 완공으로 소멸
비정 지역 창진포 - N34° 49′27.9″, E126° 34′37.6″지도보기
성격 나루|포구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영암군 서호면 금강리를 왕래할 때 이용했던 나루이자 포구.

[개설]

창진포시종면 신학리 창진 마을서호면 금강리 지네 머리를 왕래할 때 이용하였던 나루이자, 어선이 정박하거나 목포를 왕래하는 객선이 기착하던 포구였다. 현재 영암천의 하류가 영산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2012년 완공된 신금 대교가 창진 나루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명칭 유래]

『한국 지명 총람』에 의하면 창진포는 조선 시대에 영암군 북이시면에 속하였던 지역이었다. 세미를 거두어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창진(倉津)이라 했다고 하나, 조선 시대의 각종 지리지에서 확인되지 않고, 아울러 창진포의 존재도 마찬가지로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영암군 소지포가 언급되었는데, 이를 한글음으로 하면 작지포가 된다. 창진포는 이 작지포[소지포]로 추정된다.

[형성 및 변천]

분명한 창진포는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舊韓末韓半島地形圖)』에서 처음 확인되고, 이어서 일제 강점기의 『조선 오만분 일 지형도(朝鮮五萬分一地形圖)』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남쪽 금강리의 지네 머리 위치는 변함이 없지만 북쪽의 창진포의 위치는 이동되었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는 암수 머리[N34° 49′42.1″, E126° 34′18.4″]에 있었고, 『조선 오만분 일 지형도』 이후에는 쥐섬 인근 창진포[N34° 49′27.9″, E126° 34′37.6″]에 있었다.

창진포와 쥐섬 사이에 있는 갯고랑을 따라 목포행 객선 뱃길이 1970년대까지 형성되었다. 당시 목포를 오가는 교통편은 오로지 배편밖에 없었다. 여객선은 영암호, 진풍호, 인진호가 운항하였다. 1961년 10월 18일[음력] 무렵 썰물로 인하여 영암호의 창진포에 진입하기 어렵게 되자 종선(從船)이 접근했는데, 종선이 전복되어 13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 영암호는 운행을 멈추었고, 몇 달 후 진풍호와 인진호 두 대가 운항되었다. 오전에는 진풍호가, 오후에는 인진호가 다녔다.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과 영암군 도포면·시종면 사람들이 4~5㎞씩 걸어와서 창진포에서 배를 탔다. 배의 운항 경로는 목포~매월리 미교 앞~주렁진~태백[소댕이 나루]~창진포~성재포~해창의 순이었다. 창진포에서 목포까지는 약 두 시간, 영암 해창까지는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1961년 말 한 사람 뱃삯은 목포까지 65원이었다.

돛단배로는 창진포에서 목포까지 기후 조건이 적당하면 한 물[6시간 정도]에 갈 수가 있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샘기미 나루에서 6시간을 쉬었다가 물길이 바뀌면 출항하였다. 나룻배의 경우는 금강리 지네 머리를 왕복하는 나룻배로 밀물에 창진포로 건너왔다가 썰물에 돌아갔다.

1970년대에 남쪽 서호면 금강리 지네 머리에 주막집이 한 채 있었고, 북쪽 창진포에는 여섯 가구가 살았다. 창진포에는 근대 시기 5톤 미만의 어선, 안강망 어선 등 20여 척이 상주할 정도였으며, 장어 등을 잡는 외처 어선들도 입항하여 창진 마을은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980년 영산강 하굿둑 공사로 인하여 포구의 기능이 정지되자 모두 이사를 가고, 현재는 폐촌이 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 창진 마을에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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