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130
한자 靈巖郡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헌

[정의]

전라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군(郡).

[개설]

영암군은 전라남도의 서남해안 지역의 최남단에 위치한 군으로 중국의 주요 항구인 상해, 청도 등과 최단 거리에 있어 중국 대륙 및 동남아시아,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곳이다. 그리고 대불 국가 산업 단지[영암 테크노폴리스]를 비롯한 현대 삼호 중공업, 삼호 산업 단지, 대불항 등의 산업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어 서남권 개발 촉진을 통한 국토의 균형 발전에도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고대 사회로부터 유구한 지역 문화가 발전한 곳으로 자연환경이 수려한 월출산 국립 공원과 세계 3대 스포츠 가운데 하나인 포뮬러 원 코리아 그랑프리[F1 국제 자동차 경주 대회]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을 갖추고 있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영암군을 상징하는 새는 영암에 많이 서식하고 있는 산비둘기로 군민의 평화와 단결의 뜻을 담고 있다. 나무는 느티나무로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고 만고풍상을 견디며 천년을 살아가는 느티나무의 기질을 군민의 의지로 상징하고 있다. 또한 군의 꽃은 봄소식을 맨 먼저 알리기 위하여 춘설 속에 피어나는 매화로서 고고함을 군민의 기상으로 삼고, 일시에 만개하는 특징은 군의 번영을 상징한다.

[명칭 유래]

삼국 시대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이던 것을 통일 신라 경덕왕이 757년(경덕왕 16)에 영암군(靈岩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는 낭주(郎州)로 승격하여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안남도호부가 전주로 옮겨감에 따라 다시 영암군(靈岩郡)이 되었다.

[변천]

영암군은 구석기 시대의 타제 석기 등이 다수 발굴되고 있으나 청동기 시대부터 인류가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호면 장천리 청동기 시대 선사 주거지와 900여 기에 달하는 고인돌, 세형동검과 전(傳) 구림 출토 거푸집 일괄[국보 제231호] 등의 유물로 볼 때 당시 최첨단의 기술을 보유한 문화 집단이 거주하였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중심 나라인 목지국의 최후 중심권이 이곳이다. 서기 1~5세기까지 대형 옹관 고분 문화라는 독특한 영산강 유역 문화를 창조하였다. 대형 옹관 고분 100여 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은 3세기의 것으로 일본의 전방후원분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서 월나군이라 칭하였고, 군서면 구림리에서 태어났다는 왕인(王仁) 박사가 405년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스카 문화의 비조가 되었다. 당시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항구가 국제 교역 항구로 유명한 상대포가 있는데, 이곳에서 중국과 일본 등의 국제 교역이 이루어졌다.

통일 신라 때에는 고을 이름을 월나군에서 영암군(靈岩郡)으로 개칭하였고, 사적 제338호로 지정된 구림 토기 요지는 시유 도기 문화의 발상지로서 해남의 녹자, 강진 청자 제조 기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월출산 천황봉 소사(小祀) 터에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천신제를 지내었고, 도선 국사(道詵國師)의 탄생과 관련한 최씨원(崔氏園)이 설화가 전한다. 도선 국사는 풍수지리설은 고려 건국 이념의 기초가 되었다.

후삼국 때에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이 해상권 장악을 위한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데, 이는 당시 칼을 갈기 위해 숫돌을 파내어 생겼다는 여석산 천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영암 출신 최지몽(崔知夢)도선 국사 등의 활동으로 995년(성종 14) 고을 이름이 영암군에서 낭주(郎州)로 바뀌어 승격되고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018년(현종 9) 안남 도호부가 전주로 옮겨감에 따라 다시 군명을 영암군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 무렵 영암은 남부의 황원군, 도강군, 곤미현, 해남현, 죽산현 등을 영속하는 호남 서남부의 행정 중심지였으나 1172년(명종 2) 감무(監務)의 파견이 시작되는 것을 계기로 이들 군현이 독립하여 대체로 현재의 지역에 상응하는 구역으로 축소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마애불인 영암 월출산 마애 여래 좌상[국보 제144호]과 1009년에 건립된 영암 성풍사지 오층 석탑[보물 제1118호], 영암 도갑사 석조 여래 좌상[보물 제89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영암의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3대 해신당(海神堂)의 하나인 남해신사에서는 고려 현종 때부터 국조오례의에 의하여 해신제(海神祭)를 지내왔다.

조선 시대에는 완도의 장좌도[청해진]를 비롯하여 남으로 보길도, 추자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였지만, 1409년(태종 9)에는 진도가 진도군으로 분할되고, 삼산면·옥천면·화원면 일대가 해남으로 편입되었다. 1423년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당시 영암의 호수는 333호에 인구는 남자만 1,229명이었다. 이후 178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2만 9288명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1895년(고종 32) 나주부 영암군이 되면서, 나주에 속하였던 금마면, 원정면, 비음면, 종남면과 진도군의 명산면을 편입하였다. 1896년에는 보길도추자도가 완도군으로, 북평면과 송지면 등이 해남군으로 이속되고, 나주에 속한 시종면, 신북면 일부와 금정면이 편입되었다. 그 뒤 1914년 군·면 폐합 당시에는 옥천면, 북평면, 송지면 등을 해남군에 이속시켰으며, 1932년에는 곤일시면을 미암면으로 고치는 등 전반적인 면 이름의 개정이 있었다.

1979년 영암면이 영암읍으로 승격되고, 2003년에는 삼호면이 삼호읍으로 승격되어 2012년 12월 31일 현재 영암군의 행정 구역은 2읍 9면 389행정리 121법정리 707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는 1965년 14만 1489명이 거주하였으나 이농 현상과 학군 등으로 1995년에는 6만 2400명으로 줄어들었으며, 2012년 현재는 6만 215[남자 3만 654명, 여자 2만 9561명]으로 전남의 3.1%에 해당한다. 그리고 가구 수는 2만 7313가구로 전남의 3.4%에 해당한다.

[위치와 면적]

영암군의 동쪽은 장흥군, 서쪽은 서해안의 좁은 만, 남쪽은 해남군과 강진군, 북쪽은 나주시와 접하고 있는데 동경 126°21′~126°52′, 북위 34°39′~34°56′에 위치한다. 2012년 기준 총면적은 601㎢로 토지 지목별 현황을 살펴보면, 농경지 224㎢[37%], 임야 236㎢[39%], 하천 26㎢[4%], 도로 26㎢[4%], 주택지 13㎢[2%], 기타 76㎢[14%]이다.

[자연환경]

동쪽은 노령산맥의 줄기가 이어져 내려 산지를 이루고, 서쪽은 하천 하구에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남동부에 월출산이 천황봉[809m]을 최고봉으로 구정봉[743m], 사자봉 등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고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주위 일대에 백룡산[418m]·국사봉[613m]·흑석산[650m]·주지봉[491m]·도갑산[376m] 등이 솟아 있다. 월출산의 줄기 사이로 밤재[栗峙]·감재·도갑재 등이 있어 장흥·강진·해남 등지와 연결된다.

영암군의 북서부로 영산강이 굽이치고, 삼포강·영암천·도갑천·송계천 등의 작은 하천들이 북서부로 좁은 평야들을 이루어 농경지가 전개되고 저수지도 많다. 해안에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만으로는 영암만이 있다. 섬으로는 나불도와 외도 등이 있었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굿둑 공사로 육지와 이어지게 되었다.

지질은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과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화강암과 화산암으로 되어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 연 강수량은 1,539.4㎜이다.

[산업]

영암군은 동남쪽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지가 전체 면적의 37% 정도로 매우 넓다. 농경지 총면적은 222.64㎢[2011년 현재]이고, 이 중 논 162.48㎢, 밭 60.21㎢로 벼농사가 발달되었으며, 농가 인구는 2만 1386명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사과·포도·배·감·복숭아·소채류이며, 그 밖에 특용 작물로 잎담배·인삼·유채·참깨와 약용작물 등이 생산된다. 작물별 재배 면적은 미곡 159.16㎢, 서류 10.66㎢, 맥류 7.09㎢, 두류 1.16㎢, 잡곡 0.33㎢로 총 178.4㎢이며, 생산량은 미곡 7만 4168M/T, 서류 1만 6948M/T, 맥류 2,357M/T, 두류 210M/T, 잡곡 74M/T 등이다.

영암군은 바다에 면하여 있고 해상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여 과거에는 각종 농수산물과 소금 ,직물 등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근래 거래되는 주요 품목은 역시 농수산물로서, 곡물·과일·채소 등이 다른 지방으로 매매되고 의류 및 기타 일상생활에 필요한 잡화가 타 지역으로부터 들어오고 있다.

영암군의 특산물로는 달마지 쌀을 비롯하여 황토 고구마, 영암 월출 수박, 무화과·무화과 잼, 영암 고추, 영암 오이·애호박, 영암 배, 대봉 감·단감, 월출산 토마토, 영암 김장 무·영암 배추, 이 밖에도 금정 토하젓, 월출 전통 메주, 어란, 영암 장미, 영암 도기 등이 있다. 또 대표적 제조업은 죽제품인 참빗이 예로부터 알려진 이 지방의 가내수공업품으로 한때는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나, 지금은 수요의 감소로 쇠퇴해 명맥만을 유지해가고 있다.

주요 산업 시설로는 대불 국가 산업 단지[영암 테크노폴리스]를 비롯하여 현대 삼호 중공업, 삼호 산업 단지, 군서 농공 단지, 신북 농공 단지 등이 있다.

대불 국가 산업 단지[영암 테크노폴리스]는 1989~1997년까지 삼호읍 나불리난전리 일원에 총 사업비 5502억 원[산업 단지 4112억 원, 주거 단지 1390억 원]을 투입하여 11.374㎢(국가 8.602㎢, 외국인 투자 지역 1.614㎢, 자유 무역 지역 1.158㎢) 규모의 산업 단지를 조성한 것으로 유치 업종은 조선, 기계, 제강, 석유 화학, 제지, 비금속, 기타 제조업 등이다.

현대 삼호 중공업은 1999년 10월에 자본금 2000억 원으로 삼호읍 용당리 일원에 설립한 조선(造船) 산업 시설로 협력사 포함 1만 1000명의 종업원이 종사하며, 삼호 산업 단지와 대불1 공장 등의 사업장을 거느리며 매출액이 2008년 기준 3조 3000억 원에 이르러 영암군의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교통]

영암군의 교통은 대체로 예전에는 수로를 이용하였으나, 앞바다의 깊이가 얕고 영산강 하굿둑 공사로 해상 교통이 급격하게 쇠퇴하여 지금은 주로 육로에 의존한다.

해상 교통은 현재 2만 톤급 3선석의 대불항이 유일하며 또한 2만 톤급 12선석의 목포 신외항이 인근에 위치해 있다. 육로 교통은 나주~영암~강진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영암군의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고, 영암에서 목포로 가는 도로가 남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여러 곳의 시·군도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또 영암에서 30~40분대에 진입할 수 있는 목포~인천 간 서해안 고속 도로와 무안 국제 공항이 2001년과 2007년에 개통·개항되고, 2012년에는 목포~광양 간 고속 도로 건설로 광양만권까지 1시간 내 진입할 수 있어 수도권과 전남 동부권과의 교통 여건이 편리해졌다.

[관광]

영암군의 관광 자원은 자연 경관이 수려한 국립 공원인 월출산도갑사·천황사 및 선사 시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역사 유적, 그리고 영산호 등이 주축을 이룬다. 유원지와 휴양 시설로는 월출산 기찬 랜드, 기찬 랜드 토요 콘서트, 뱅뱅이골 기찬 랜드, 기찬 묏길, 기(氣) 건강 센터, 다솜 리조트 등이 있다.

삼한 때부터 내려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구림 마을은 4백년이 넘은 전통의 대동계가 현존하며, 백제 왕인 박사, 신라 말 도선 국사, 고려 초 최지몽 등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그리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시원이 되는 황토자기의 발상지이다. 선사 시대부터 이 고장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황토 자기가 전국에 보급되었으며 해상을 통한 중국, 일본과의 교류를 시작한 여러 흔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마을 내에는 유형 문화 자원인 회사정, 국암사, 담숙재 등 12개의 누정과 전통 가옥, 돌담, 고목 등이 즐비하게 옛 그대로 남아 있고,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위해 매년 올리는 당산제와 구림 대동계 등 민속 문화 자원이 전승되고 있다.

구림 마을영암 도기 박물관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황토를 재료로 하여 1,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구림 도기를 한국적인 정서가 깃든 영암 도기로 재현하고 있다. 또 전시실, 체험실, 판매장 등이 갖추어져 있어 전국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 밖에도 영암의 관광 명소로 영산호 관광 농업 박물관을 비롯한 영암군립 하 미술관, 주거 변천사 야외 전시장, 왕인 박사 유적지, 마한 문화 공원, 장천리 선사 주거지, 영암 공원 등이 있다.

2011년 기준 영암군의 문화재는 국가 지정 문화재 16점, 전라남도 지정 53점, 등록 문화재 1점 등 총 70점이다. 국가 지정은 국보 2점, 보물 9점, 사적 1점, 천연기념물 1점, 중요 민속 문화재 3점이며, 전라남도 지정은 유형 문화재 9점, 기념물 21점, 민속 자료 8점, 문화재 자료 15점 등이다.

국보로는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영암 월출산 마애 여래 좌상[국보 제144호], 보물은 영암 도갑사 석조 여래 좌상[보물 제89호]·영암 성풍사지 오층 석탑[보물 제1118호]·영암 도갑사 목조 문수·보현 동자상[보물 제1134호]·영암 엄길리 암각 매향비[보물 제1309호]·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보물 제1395호]·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 석탑[보물 제1283호]·영암 도갑사 오층 석탑[보물 제1433호] 이 있으며, 사적으로는 영암 구림리 요지[사적 제338호] 등이 있다.

[교육·문화·복지]

전통 사회에서 영암의 최고 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영암 향교는 1420년에 창건되었다.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유지해오다가 1918년에는 실화로, 1950년에는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1950년부터 중건에 착수, 대성전을 복구하고 1969년 명륜당을 복원하였으며, 1976년에는 격식대로 규모를 갖추었다.

서원은 녹동 서원, 죽정 서원, 서호 서원 등이 있었다. 녹동 서원영암읍 교동리에 있는데 1630년(인조 8)에 창건하여 1713년(숙종 39)에 사액되었으나,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지금은 영보 강당만이 남아 있다. 서호 서원과 죽정 서원은 1681년 군서면 구림리에 세워진 것이다.

신교육 기관의 개설은 1908년 영암읍 회문리에 세운 영암 초등학교가 효시이며, 이어서 서창 초등학교[1920], 신북 초등학교[1922년], 금정 초등학교[1923년], 시종 초등학교[1924년], 장천 초등학교[1924년], 도포 초등학교[1925년], 학산 초등학교[1926년)가 차례로 개교하였다. 중학교로는 회문리에 1946년 11월 개교한 영암 중학교가 처음이며, 고등학교는 1951년 11월에 회문리에 세운 영암 고등학교가 첫 번째이다.

2011년 기준 영암군의 교육 기관으로는 유치원 19개소,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6개교, 전문대학 1개교, 대학교 2개교, 대학원 1개교, 기타 학교 2개교가 있다.

지역 문화 복지 시설은 군민회관 1개소, 종합 복지 회관 11개소, 청소년 수련원 1개소, 문화원 1개소, 아동 복지 시설 1개소 등이다.

전통 민속놀이 및 축제 행사로는 도포제 줄다리기, 정동 정호제, 장부질 노래, 여석산 쌍패 농악, 영암 갈곡 들소리, 구림·영보·장암·은곡 대동계, 월출산 바우제, 왕인 박사 춘향 대제, 왕인 문화 축제, 왕인 국화 축제, 가야금 산조 축제, 영암호 해맞이 축제, 무화과 축제, 월출산 달맞이 공연, 도선 국사 문화 예술제, 영보 풍향제, 한옥 건축 박람회 등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