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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486
이칭/별칭 마혜(麻鞋),망혜(芒鞋),마구(麻屨),승혜(繩鞋),삼신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집필자 이명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생산|제작처 미투리 - 전라남도 영암군
전시처 전라남도 농업 박물관 -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나불리 307지도보기
성격 생활 용구
재질 삼|모시 껍질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삼을 주재료로 하여 만들어 신던 신.

[개설]

미투리 는 삼이나 모시 껍질 또는 실, 헝겊, 종이 따위로 가늘게 꼰 노끈을 이용하여 삼은 신을 말한다. 마혜(麻鞋)·망혜(芒鞋)·마구(麻屨)·승혜(繩鞋)·삼신이라고도 불렀다.

미투리 는 보통 여섯 개의 날에 50~60개의 총을 세워 정교하고 날씬하게 만드는데, 만든 재료나 만듦새 또는 만든 곳에 따라서 왕골신[菅履], 청올치신[葛履], 부들신[香蒲履], 무리바닥, 지총미투리, 절치, 탑골치 등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미투리 의 연원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짚신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옛 문헌에 의하면 『통전(通典)』 변방문(邊防門) 동이(東夷) 마한 조(馬韓條)에 ‘초리(草履)’가 나오고, 『진서(晋書)』 사이전(四夷傳) 마한 조에 ‘초교(草蹻)’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짚신과 미투리는 이미 삼국 시대부터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미투리 는 짚신보다 고급품이기는 하나 피혁제(皮革製)·포백제(布帛製) 신이 출현하면서 점차 천시되었다. 예컨대 『성호사설류선(星湖僿說類選)』에서는 왕골신이나 망혜는 가난한 사람의 신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미투리도 신분에 따라 그 재료나 구조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투리는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서민층의 남녀가 사용했고, 섬세한 제품만이 일부 사대부 계층에서 편복(便服)에 신었던 신으로 볼 수 있다.

[형태]

삼신·왕골신·청올치신·부들신은 미투리를 삼는데 쓰이는 주재료가 생마와 왕골·칡·부들인 데서 비롯한 명칭이다. 무리바닥은 쌀을 물에 불려 갈아서 체로 받쳐 가라앉힌 앙금을 무리라고 하는데 이 앙금을 바닥에 먹인 미투리를 말한다. 이 신발은 매우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신발이었다.

또 지총미투리는 종이를 꼬아서 만든 노끈으로 신 앞과 옆쪽에 박힌 낱낱의 올인 총을 삼은 것을 말하며, 절치는 거칠게 삼은 미투리로 절에서 마구 삼아 신은 데서 비롯한 명칭이다.

그리고 탑골치는 튼튼하게 잘 삼은 미투리인데 예전에 서울 동대문 밖 탑골의 장인들이 삼은 데서 유래하였다. 이밖에도 선비들이 맑은 날 나들이 할 때 신거나 미혼남녀의 장식 신인 꽃미투리도 있었다.

영암군 삼호읍에 위치한 전라남도 농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투리를 보면, 그 형태와 삼는 방법이 짚신과 매우 비슷하다.

짚신은 짚으로 새끼를 한 발쯤 꼬아 넉 줄로 날을 하고, 짚으로 엮어 발바닥 크기로 만들어 바닥을 삼는다. 양쪽 가장자리에 짚을 꼬아 총을 만들고 뒤는 날을 하나로 모은다. 다시 두 줄로 새끼를 꼬아 짚으로 감아 올려 울을 하고, 가는 새끼로 총을 꿰어 두르면 발에 신기에 알맞게 된다.

이에 비해 전라남도 농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투리는 주로 질긴 삼 껍질로 삼았고, 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날이 여섯 줄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여섯 개의 줄에는 50개의 총을 세워 바닥이나 총이 아주 정교하고 날씬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무게도 가벼워 신고 다니기에 매우 편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영암 지역의 농민들은 예로부터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해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을 제작했다. 예컨대 남자들은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치며 삼태기, 짚신 또는 미투리 등을 만들었고, 부녀자들은 길쌈을 하면서 긴 겨울밤을 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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