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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049
한자 金昌祖
이칭/별칭 악성(樂聖)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윤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6년연표보기 - 김창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김창조 전라남도 광주시로 이주해 연주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김창조 전라북도 전주시로 이주해 연주 활동 및 후학 양성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김창조 전라남도 광주시로 이주
몰년 시기/일시 1919년연표보기 - 김창조 사망
출생지 김창조 출생지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지도보기
성격 국악인
성별
본관 김해

[정의]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근대 시기 가야금 산조의 명인.

[개설]

김창조(金昌祖)[1856~1919]는 영암읍 회문리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악성(樂聖)이다. 세습 율객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적 소질은 천부적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공교육을 통해서 음악을 배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8세 무렵부터 가야금 수업을 시작하였고 그 솜씨가 탁월하여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천부적 소질은 가야금뿐만이 아니라 해금을 비롯하여 대금, 퉁소 등 거의 모든 악기에 능통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것은 1885년 그의 나이 30세가 되면서부터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매우 절제 있는 생활을 하였고, 음악을 대하는 태도 또한 모범적이었다고 한다. 35세 되던 해부터는 연주는 물론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었고, 1890년부터 1895년 사이 산조라는 새로운 음악 형식을 개척하였다.

김창조의 가장 큰 업적은 시나위 가락에 가야금을 연주한 가야금 산조의 창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후 거문고·대금·해금·단소·피리·아쟁·새납 등의 악기마다 산조가 출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활동 사항]

김창조가 창조한 산조는 당대의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널리 확산되었다. 하지만 정작 영암을 떠나 전주와 광주, 전라도 일대, 심지어는 대구 등지를 오가며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게 된 것은 60세 이후부터이다. 영암에서의 활동이 가장 중심된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김창조는 가야금 연주만을 주요 활동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가야금 병창에도 조예가 깊어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거문고·해금·젓대·피리·단소 가릴 것 없이 기회가 되는 대로 연주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5년 60세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는데, 이미 가야금 산조로 명성을 얻은 후라 광주 사람들이 연주회를 마련하였다. 이때 연주한 곡목을 보면 가야금 산조 전곡, 거문고 산조 중의 일부, 판소리 춘향가와 단가 등의 가야금 병창, 젓대산조 중의 일부, 단소 한 곡, 해금 한 곡 등으로 매우 다양하면서도 격조 있는 작품들을 연주했음을 알 수 있다.

61세 되던 해인 1916년에는 전주로 거처를 옮겼으며, 연주 활동과 제자들을 길러 내는 과정에서 산조의 다른 형태인 장별 설정을 완성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1917년 7월에는 김창조회갑을 맞이하여 제자들이 스승을 위한 축하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때 연주한 곡목이 「가야금 산조」였다. 이는 김창조가 창작한 장별제 산조가 매우 짧은 시간에 대중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산조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1920년대라고 한다. 따라서 김창조가 전주에 기거하던 시기가 산조의 확산을 가져오게 된 중요한 시기가 된 셈이다. 전주에서의 활동은 군산, 나주, 정읍, 대구 등으로 확장되었다.

64세 되던 1919년에 다시 광주로 옮겼지만 생활이 매우 궁핍했던 탓인지 인후염에 걸렸는데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그해 8월에 광주 북문안의 어느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등의 일정한 틀을 갖춘 음악 형식을 창작한 것은 1890년경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산조의 형태가 된다. 산조의 창시자라는 별명은 산조의 창작이 가야금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10여 년 후에 동일한 양식으로 백낙준이 거문고 산조를, 박종기·강백천이 대금 산조를, 지용구가 해금 산조를 창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전용선이 단소 산조를, 편재준이 퉁소 산조를, 이충선이 피리 산조를, 한일섭이 새납 및 아쟁 산조를 창작하였다. 그야말로 산조의 효시가 된 셈이다. 이런 창작 정신은 훗날 산조의 혁명이니, 불후의 명작이니, 형이상학적 정신세계니 하는 등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김창조가 창조한 가야금 산조는 판소리에 기반하고 있다. 음조는 물론 장단 구성에 있어서도 그 특징이 드러난다. 장단 구성을 보면 다스름 가락, 진양조 5장, 중모리 5장, 중중모리 3장, 자진모리 5장으로 되어 있다. 빠르기는 우리 음악의 전통 양식인 3기법, 즉 만기, 중기, 삭기 형태를 각각 느리게, 보통으로, 빠르게 순서로 배열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후세의 제자들을 비롯한 연주가들이 이를 바탕으로 엇중중모리, 휘중중모리, 엇모리, 굿거리, 휘모리, 단모리 및 늦은중모리 등의 장단을 구성하여 재창조의 변화를 도모하게 된다.

산조의 장별 설정은 사실상 그 목적이 연주에 있다기보다 교습을 하기 위한 일종의 교재곡적 특성이 강하다. 본래 산조의 의미가 ‘허튼 음악’이라는 어의에서도 드러나듯이 매우 즉흥적인 음악이었기 때문에 전수하기에 매우 큰 어려움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특히 기악을 대중화하는 데 있어서 이 즉흥성이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간의 즉흥적 양식을 전수하기 쉬운 율조와 장단 구성을 통하여 해결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기반으로 삼은 것이 판소리의 율조와 장단이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로 말미암아 산조는 급속하게 제자들을 길러 내거나 대중 속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창조의 수제자들 중에 이름난 연주자들이 많지만, 안기옥 같은 이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안기옥이 월북하여 남한에서는 그의 족적을 더듬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다. 안기옥은 북한 기악의 대강을 정리하면서 걸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제자들이 중국의 동북 삼성에 거주하는 일명 조선족들에게까지 널리 전파하여 이른바 김창조의 산조 맥락을 확산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중국 조선족의 예를 들면, 1955년에 평양 음악 대학에 유학했던 김진이 당시 안기옥에게 김창조 산조를 전수받아 연변을 중심으로 중국에 널리 확장시켰다. 안기옥을 포함해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정남희, 김광준, 한성기, 정운용, 강태흥, 유동혁, 김병호, 최옥삼, 김윤덕, 성금연, 김죽파, 함동정월 등 이른바 김창조의 후계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왕성하게 그 맥이 전승되고 있다.

실제로 북한은 1961년도에 북한, 소련, 중국에서 우륵의 음악 활동 141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국제적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우륵을 추대할 때 김창조의 업적을 함께 기리는 것으로 나타나 김창조의 명성이 현재 남북한을 망라한 한민족에게 널리 선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2004년 한국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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