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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신씨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859
한자 居昌愼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집필자 정윤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거창 신씨 본관 - 경상남도 거창군
입향지 거창 신씨 입향지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거창 신씨 집성지 - 전라남도 덕진면 영보리|노송리
성씨 시조 신수
입향 시조 신후경

[정의]

신수를 시조로 하고 신후경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영암군의 세거 성씨.

[연원]

거창 신씨(居昌愼氏)의 시조인 신수(愼脩)[?~1101]는 원래 송나라 개봉부 사람이었으나 고려 문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신수가 죽은 뒤 신수의 아들인 신성(愼成)이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 내려가 살면서 거창 신씨의 시원이 되었다.

[입향 경위]

영암 지역의 거창 신씨는 참판공파 후손들이며, 최덕지(崔德之)[1384~1455]의 막내 사위인 신후경(愼後庚)이 영보촌[현재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 입향하면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신후경의 아들 신영명(愼榮命)[1451~1498]은 영보촌에 살다가 보성 선씨와 혼인하여 15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지금의 덕진면 노송리 송내 마을에 입향하였다. 신영명은 1474년(성종 5)에 이우당(二友堂)을 건립하여 송내 마을 인근 사림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하게 하였다.

신후경의 증손자 신희남(愼喜南)[1517~1591]은 당대의 명유들과 폭넓은 교유를 맺고 있던 인물로, 수찬(修撰)[홍문관의 정6품 벼슬]과 사간(司諫)을 거쳐 좌승지와 강원 감사를 역임한 뒤 귀향해 은거하면서 향론을 이끌어 갔다. 그는 임구령, 박규정, 이후백, 백광훈 등과 힘을 합쳐 영암 지방의 향약 및 향안을 마련하였으며, 문하에서 남평 문씨 문익주(文益周) 등이 배출되었다.

거창 신씨는 조선 전기의 사족적 배경 아래 임진왜란 후에도 기반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특히 신천익(愼天翊)[1592~1661], 신해익(愼海翊)[1592~1616] 형제의 학행은 가문의 지역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

[현황]

영암 지역의 거창 신씨는 2012년 현재 80여 가구 2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덕진면 노송리에 60여 가구, 덕진면 영보리에 10여 가구 정도가 모여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영암 지역의 거창 신씨 관련 유적으로는 1796년(정조 20)에 건립하여 신희남, 신천익, 신해익을 배향한 송양사(松陽祠)가 있다. 거창 신씨의 활동은 전주 최씨와 긴밀한 유대 속에 진행되어 동족으로서의 협력 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존양사(存養祠), 영보정(永保亭), 연촌 영당(烟村影堂)을 함께 건립하였고, 영보정 동계는 두 성씨의 공동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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