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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673
한자 南海堂址
이칭/별칭 남해신사 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산1005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윤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 9월 29일연표보기 - 남해당지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남해당지 전라남도 기념물 재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8년 - 남해당지 영암군에서 매입
소재지 남해당지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산1005지도보기
성격 신사 터
지정 면적 8,291㎡
관리자 영암군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기념물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에 있는 고려 시대부터 개항기까지 제의를 행하던 신사의 터.

[개설]

남해당지(南海堂址)남해신사(南海神祠)의 제의를 행하던 신사 터로, 고려 시대 전라남도 지방의 국가 제사 중의 하나를 모시던 곳이다.

조선 시대의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국사(國祀)를 모신 삼대 해신사(海神祠)를 기록하고 있다. 동해를 수호하는 동해묘(東海廟)를 강원도 양양에, 서해를 수호하는 서해단(西海壇)을 황해도 풍천에, 남해를 수호하는 남해신사(南海神祠)를 전라도 나주에 두었으며, 북쪽은 바다가 없어 해신(海神)을 모시는 대신 강신(江神)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 시기에는 국제(國際)를 지냈던 곳은 영암 월출산과 완도 청해진으로 알려져 있고, 고려 시대의 국제는 지리산과 무등산, 금성산 등이기에 남해당지를 포함하여 영암 지역의 국가적 제사 터를 짐작할 수 있다.

삼대 해신을 모신 사당의 이름이 각각 ‘묘(廟)’와 ‘단(壇)’, 그리고 ‘사(祠)’로 표기된 것은 아마도 해당 해역의 전통적인 마을제 등의 신앙 형태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긴 하지만, 모두 국가적인 해신 숭묘의 제의 터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남해당지는 1986년 9월 2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변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1028년(고려 현종 19)에 이르러 비로소 사전(祀典)에 올렸다.”라는 기록을 통해 사지(祠址)의 연원을 알 수 있다. ‘남해신사’는 흔히 ‘남해당(南海堂)’이라고 불렸는데, 폐허로 남아 있다가 1998년에 영암군에서 매입하여 2001년 이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이곳 남해신사나주목에 속해 있었다. 여기서 나주는 나주군 종남면으로, 1895년 행정 제도 개편에 의해 영암군으로 편입된 시종면 일대를 지칭한다. 2002년 1월 15일에 위폐를 봉안하고, 2003년 4월에 영암 군수가 초헌관으로 제를 모시게 되었다. 영암군의 의지로 옥야리에 신당을 조성함으로써 연차적인 복원화 사업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지 부근에서는 독무덤 등의 선사 유적들까지 출토되어 선사 시대로부터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말해 주는 듯하다.

실제 영산강을 통한 도서와 내륙 간의 해양 루트라는 측면에서도 시종면의 지정학적 위치는 매우 주목할 만한 곳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공도 정책으로 진도 군민들을 소개시켜 약 80여 년을 살게 한 장소이기도 하다. 내륙과 도서 해양을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위치]

남해당지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산1005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77년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한 이후 영암군에서 주도적으로 남해당지를 관리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를 보면 구릉 사면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며, 이 중 상단이 제사지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사지는 주변보다 높게 조성하였기 때문에 인근 영산강을 넓게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2열의 석축으로 담장 시설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기류, 기와류, 동전류, 토제품, 철제품 등이 수습되었다. 고대의 서해안 죽막동 유적처럼 해신을 모시는 고려 시대 제사 터가 발굴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황]

남해신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주의 남쪽 45리에 있다. 사전에 중사로 기록되었으며,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라는 내용이 있다. 같은 책에 남해신단에 대하여는, “남쪽으로 40리에 있는데, 중사를 모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해신사 터에서는 해신제로서 어로와 관련된 출토 유물과 민속적인 자료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해신제 가운데 시설물의 흔적이 유일하게 확인된 곳이기도 하다.

남해신사 내부는 2단으로 분류하여 묘당이 설치되어 있는 상단과 제사를 모시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은 제사를 모시는 장소로서 방형의 묘당 시설이 조성되어 있고, 묘당으로 연결되어 있는 보도 시설은 석재를 이용하여 양쪽 경계 부분을 조성하였다. 이처럼 단을 만들어 구분하고 다시 석축 시설을 축조함으로써 신성함에 대한 차별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같은 영험성이나 신성성은 하마비(下馬碑)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지금은 매몰되어 그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일정 신성한 공간의 경계에 하마비를 두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서 당에 들어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 정성이 부족하면 제사를 지내던 수령이 급사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2명씩 순서를 정하여 제사를 모셨다고 전한다. 특히 군의 수령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묘당은 가장 상단에 있었는데, 용이 사방에 조각되어 가까이 접근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서까래나 용마루는 모두 용각과 용 비늘이 단청되어 있어서 그 형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다고 한다. 이를 ‘남해신’ 혹은 ‘용신’이라고 인식했는데, 제사를 지낼 때면 무안군 일로면 청호리의 주룡량에서 용이 나타나 남해포로 들어오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물을 관장하는 용신에 대한 관념과 습합(習合)되어 2013년 현재 복원된 백발 수신의 용신도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전통적인 관념은 남해포의 당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해당지는 영암군에서 관리하기 전까지 남포의 마을 주민들이 관리하였다. 마을 당제로 모셔졌기 때문이다. 현재는 마한 유적 공원지에 포함되어 영암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해당지는 고려 시대 이후 삼대 해신사 중 하나였던 남해신사 터로 지금은 내륙이 되었지만 조선 시대 말까지 영산강이었다는 점, 또 그것을 바다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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