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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향교 공적비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626
한자 靈巖鄕校功績碑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로 73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05년경 - 영암 향교 공적비군 김계현 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637년경 - 영암 향교 공적비군 이기남 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638년경 - 영암 향교 공적비군 이경면 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650년 - 영암 향교 공적비군 침향교 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660년경 - 영암 향교 공적비군 신희계 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754년 - 영암 향교 공적비군 이양중 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81년 - 영암 향교 공적비군 권창섭 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05년 - 영암 향교 공적비군 김회수 선정비 건립
현 소재지 영암향교 공적비군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로 73[교동리 356]지도보기
성격 비석
양식 호패형
관련 인물 김계현|이기남|이경면|신희계|이양중|권창섭|김회수
재질 석재
크기(높이,너비,두께) 100㎝[김계현 비 높이]|52㎝[김계현 비 너비]|145㎝[이기남 비 높이]|44㎝[이기남 비 너비]|149㎝[이경면 비 높이]|47㎝[이경면 비 너비]|108㎝[신희계 비 높이]|50㎝[신희계 비 너비]|200㎝[이양중 비 높이]|63㎝[이양중 비 너비]|88㎝[권창섭 비 높이]|45㎝[권창섭 비 너비]|88㎝[김회수 비 높이]|45㎝[김회수 비 너비]
소유자 영암 향교
관리자 영암 향교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영암 향교에 있는 조선 후기부터 개항기까지의 역대 영암 군수 공적비.

[개설]

조선 시대 지방관은 이임(移任)하면 선정비를 세우는 게 관례로 되어 있었다. 선정비, 불망비, 영세불망비 등의 이름으로 세워졌는데, 재료는 철비나 석비, 형태는 호패형이거나 비갓을 갖추는 경우도 있었다.

[건립 경위]

영암 향교 공적비군(靈巖 鄕校 功績碑群)은 조선 후기부터 개항기에 이르기까지 영암 군수를 역임한 역대 군수의 재임 또는 이임 시기에 건립된 7기로 이루어졌다. 1601년 11월 20일부터 1605년까지 재임하였던 군수 김계현(金繼賢), 1637년 4월부터 1637년 6월까지 재임하였던 군수 이기남(李箕南), 1637년부터 1638년까지 재임하였던 군수 이경면(李慶綿), 1659년부터 1660년까지 재임하였던 군수 신희계(辛喜季), 1750년부터 1754년까지 재임하였던 군수 이양중(李養中), 1880년부터 1881년까지 재임하였던 군수 권창섭(權昌燮), 1903년 8월 21일부터 1905년 2월 20일까지 재임하였던 군수 김회수(金晦秀)를 기리는 선정비 7기이다.

이양중[1754], 권창섭[1881], 김회수[1905] 군수의 선정비 3기는 건립 연대가 확인된다. 그 외 김계현, 이기남, 이경면, 신희계 군수의 선정비는 건립 연대 확인이 어렵지만, 이임 직후인 1605년경[김계현], 1637년경[이기남], 1638년경[이경면], 1660년경[신희계]에 각각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김계현은 1601년(선조 34) 11월 20일에 영암 군수로 제수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고, 전라도 암행어사 목장흠(睦長欽)의 서계에 따라 김계현에게는 표리(表裏)가 하사되었다. 영암 군수로 재임하던 중 공적으로 표리가 하사되고 선정비가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경면은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암 군수로 재임하던 중이던 1638년(인조 16년) 1월 4일에 임금이 서산 군수 이진철, 영암 군수 이경면, 신계 현령 정호신을 숭문당(崇文堂)에서 인견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경면은 전선(戰船)과 능로군(能櫓軍) 등 군사 문제를 건의하였다.

신희계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암 군수로 제수하기 한 해 전에 문신 중시에서 서얼로서 장원을 하여 국조(國朝) 이래 없었던 일이라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이양중은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영암 군수로 재임하던 중 전라도 어사 한광회(韓光會)의 수계(繡啓)에 따라 임금이 ‘그 선치(善治)가 도내에서 으뜸이라 할 만하니 특별히 가자(加資)[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 같은 연유로 선정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김회수는 1891년 5월 증광 진사에 올라 혜민원 참서관으로 있다가 1903년 8월 21일 영암 군수로 임명되어 1905년 2월 20일 김천 군수로 이임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위치]

영암 향교 공적비군영암군 영암읍 교동로73 영암 향교 경내 외삼문 밖에 있다. 영암 향교영암군청에서 구림으로 가는 옛 지방도 819호선 도로 옆에 있다.

[형태]

영암 향교 공적비군의 2기는 호패형의 석비이고, 5기는 비 머리를 갖추고 비신과 한 돌로 되어 있다. 비석의 크기는 아래와 같다.

1기 김계현 선정비(金繼賢 善政碑): 높이 100㎝, 너비 52㎝

2기 이기남 선정비(李箕南 善政碑): 높이 145㎝, 너비 44㎝

3기 이경면 선정비(李慶綿 善政碑): 높이 149㎝, 너비 47㎝

4기 신희계 선정비(辛喜季 善政碑): 높이 108㎝, 너비 50㎝

5기 이양중 선정비(李養中 善政碑): 높이 200㎝, 너비 63㎝

6기 권창섭 선정비(權昌燮 善政碑): 높이 88㎝, 너비 45㎝

7기 김회수 선정비(金晦秀 善政碑): 높이 88㎝, 너비 45㎝

이외에 침향교(枕香橋)를 새로 만들면서 세운 비가 있다. 침향교비의 규모는 폭이 168㎝, 너비 52㎝이고, 1650년에 세워졌다. 27행[1행 27자]의 비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금석문]

영암 향교 공적비군의 각 비석에 적혀 있는 금석문은 아래와 같다.

1기 김계현 선정비: 군수 김 공 계현 선정비(郡守金公繼賢善政碑)

2기 이기남 선정비: 군수 이 공 기남 청덕 선정비(郡守李公箕南淸德善政碑)

3기 이경면 선정비: 군수 이 후 경면 염백 휼민비(郡守李侯慶綿廉白恤民碑)

4기 신희계 선정비: 군수 신 공 희계 선정비(郡守辛公喜季善政碑)

5기 이양중 선정비: 군수 이 공 양중 청덕 선정비(郡守李公養中淸德善政碑)/5년 재임 공적을 나라에서도 인정하니 그 끼치고 사랑하는 바 오래리라. 백 리 먼 곳까지 이어질 것이니 근심 없어져 즐겁지 아니한가.(五載其賜 令之遺愛 百里妥帖 悒然不樂/乾隆十九年甲戌至月日 近四面竪立)

6기 권창섭 선정비: 군수 권 공 창섭 청백 선정비(郡守權公昌燮淸白善政碑)/요역을 줄여주는 혜택을 베풀었으니 백 리가 시원한 바람 불듯 하도다. 순리에 따라 다스리니 어질고 따뜻하며 산처럼 높고 물처럼 깊도다.(惠蠲徭役 百里淸風 征循溫良 山高水長/光緖七年辛巳月日 邑八洞竪立 座首 □一住 吏房 □準泰)

7기 김회수 선정비: 행군수 김 후 회수 청덕 선정비(行郡守金侯晦秀淸德善政碑)/끊고 끊어서 모두에게 보답하리. 강물이 젖은 듯하네. 근본을 심어 편안히 하니 산처럼 이름난 고을되었네.(斷斷圓報 化霑吳水 元元賴安 名蔚魯山/甲辰七月 日)

[현황]

선정비 7기는 원래부터 영암 향교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향교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모아져 세웠다고 한다. 이때 군수 선정비 외에도 후대의 공적비나 유래비 등도 함께 세운 것으로 보인다. 외삼문 입구에 다듬은 돌로 기단을 쌓고 개별 비석의 받침대를 사각으로 마련한 뒤 선정비와 후대의 비석들을 일렬로 나란히 세웠다.

[의의와 평가]

영암 향교 공적비군은 조선 시대 목민관의 치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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