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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76
한자 靈巖靑年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62번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기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0년 7월 21일연표보기 - 영암 청년회 창립
최초 설립지 영암 열무정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62번지지도보기
성격 사회 운동 단체

[정의]

1920년 전라남도 영암 지역 청년들이 설립한 사회 운동 단체.

[개설]

영암 청년회는 1920년 7월 김자명(金子明), 한동석(韓銅錫)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계몽 활동과 민립 대학 설립 등 민족주의 운동 단체로서 활동하였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적 단체로 전환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변천]

1920년 7월 21일 영암 열무정에서 영암 청년회가 창립 총회를 열고 김자명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한동석, 김준오(金俊午)가 이어서 회장을 맡았으며 1923년까지도 민족주의 계몽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 성격의 변화가 감지되는데, 1924년 4월에는 조선 청년 총동맹에 가입하였으며 1925년 10월에는 총회에서 회원의 연령을 30세로 제한하고 노농부를 설치하는 한편, 소작인회와 머슴회의 조직과 후원을 논의하는 등 이른바 ‘혁신’을 시도하였다. 이 무렵부터 사회주의 세력 간의 노선 대립에도 개입하고 전남 청년 연합회에도 참여하여 조사원(曺士元)이 집행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 창립 이후 1924년까지는 독서회, 노동 야학, 유치원, 여자 강습소 등 계몽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또 1922년 영암 소년단 창립을 지원하고 소년회 창립 1주년을 맞아 전조선 소년 서화 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무산 아동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낭남 학원(朗南學院)을 설립하였다. 낭남 학원은 교사와 운동장, 농업 실습지까지 갖추고 계속 활발한 교육 활동을 벌여 1931년 현재 주간부 100명, 야간부 8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1925년 이후에는 소작 쟁의 지원,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연설회 등을 주로 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암 청년회는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성향이 변화하였지만 1920년대 지역 사회에서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중심적 단체로 기능했다. 영암 청년회 구성원들은 이후 신간회 활동과 1930년대 항일 운동의 주역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 정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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