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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51
한자 永保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영암읍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변남주

[정의]

고려시대 이후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영암읍 역리에 설치되었던 교통 통신 기관.

[개설]

고려 성종 대에 전국을 12목으로 나눈 군현제의 확립과 더불어 구체화된 역참제는 현종 대에 와서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驛)으로 완성되었다. 이때 영암 영보역의 경우는 승라주도(昇羅州道)에 속한 30개 역 중의 하나로 나주의 청암도역 관할에 속하였다. 각 역에는 말과 역장(驛長), 역정(驛丁)을 두었다.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역참이 역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고려 때 영암의 역로는 해남군 계곡면의 별진역~해남군 덕진면의 영보역~나주시 세지면 오림역으로 연결되었으나 조선에 들어와 크게 변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시대에 이르러 왕권 강화와 함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지방 조직을 정비하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였다. 이에 중앙과 지방간 교통 통신의 기능을 하는 역참 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체계적인 조직망을 확립하게 되었다.

[관련 기록]

『여지도서(輿地圖書)』 역원 조에 보면, “영보역은 군의 북쪽 성 밖에 있으며, 역리가 15명, 역노가 17명, 역비가 2명, 말이 6두가 있고 청암도 소속이다[永保驛 在郡北城外 吏 十五 奴 十七 婢二馬六 靑巖所屬].”라고 하였다.

[내용]

조선 전기에는 고려의 역참 제도를 계승하면서 역의 신설과 이속 및 폐지를 통해 역로를 재정비하였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2년(세조 8)에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추가로 두었다. 당시 영암의 영보역은 나주의 청암도 찰방의 관할에 있는 12역 중의 하나였다. 12역은 청암역(靑巖驛)·영신역(永申驛)·선엄역(仙嚴驛)·신안역(新安驛)·녹사역(綠沙驛)·가리역(加里驛)·경신역(景申驛)·광리역(廣利驛)·오림역(烏林驛)·영보역(永保驛)·단암역(丹巖驛)·청송역(靑松驛) 등이다.

[변천]

조선 시대에 들어와 중요한 변화는 신안역의 신설이다. 나주로 가는 역로가 영원재를 넘어서 오림역으로 향하던 길에서 덕진교를 지나 나주의 신안역으로 변하게 되었다. 해남에서 나주로 가는 역로가 별진역[지금의 해남군 계곡면]~영보역[지금의 영암읍 역리]~신안역[지금의 나주시 왕곡면]으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영보역은 이름은 그대로 두고 위치를 변경하게 되는데, 덕진면 영보리 마을에서 영암읍 역리 마을로 이동하였다. 18세기 『여지도서』에 의하면, 영보역에는 역리(驛吏)가 15명, 역노(驛奴)가 17명, 역비(驛婢)가 2명, 말이 6두가 배치되어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 군사 정보의 전달 등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1884년(고종 21) 서울에 우정총국이 창설되어 현대화된 통신 우편 제도를 실시하게 되면서 전국의 역참 제도는 1895년(고종 32)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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