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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38
한자 漕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변남주

[정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영암에서 수도까지 세곡을 배로 운반하던 국가 제도.

[개설]

고려 시대 영암에는 12대 조창으로 장흥창(長興倉)이 설치되었다. 영암군의 관할 아래 있는 영암, 해남, 강진 일대의 세곡을 모아 조운선에 실어 개경에 납입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영암군은 나주 영산창에 세곡을 납부하였다가, 1512년(중종 7) 영산창의 기능이 영광 법성포창으로 이관되자 법성포창으로 납부하였다. 17세기 후반 조선에 전국적으로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영암군에도 해창이 설치되어 세곡을 직접 한양으로 운반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운(漕運) 은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세곡을 배로 운반하는 제도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서 거둔 조세인 현물을 내륙의 수로나 바닷길을 이용하여 수도인 중앙으로 운송하였다. 강과 바다의 출발지와 도착지에는 조창을 설치하였다. 세곡은 겨울철에 거두어들인 후 이른 봄철에 중앙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였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조동포의 과거 명칭은 신포이고, 장흥창은 영암군에 있다[潮東浦 前號薪浦 靈巖郡長興倉在焉].”라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를 보면, “고장흥창은 군에 있었으며, 고려 초기에 설치하여 인근 군·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한 12대 조창으로 지금은 토성(土城)의 터가 있다[古長興倉 在郡 高麗初設倉 收附近州縣租稅漕 至京 卽十二倉之一 今有土城基址].”라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전세는 정월에 창고를 열어 2월에 수납하여 해창에서 싣고, 영암군의 이진, 우수영 앞 바다, 영광 법성포, 충청도 원산, 영종포을 거쳐 광흥창에 도달하는데, 20일 일정이다[正月開倉二月收捧自海倉裝載 歷本郡梨津 前洋右水營 靈光法聖 忠淸道 元山 永宗浦 達于廣興倉前 二十日程].”라고 하였다.

[내용]

1. 고려 시대

고려 초기에 영암군에는 고려 12대 조창으로 장흥창(長興倉)이 설치되었다. 영암의 관할하에 있는 영암, 해남, 강진 일대의 세곡을 모아 조운선에 실어 개경에 납입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초에 조운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장흥창의 세곡 운송비는 영암에서 개경까지 8섬의 세곡을 운반하면 그 비용으로 1섬을 지출하였다. 장흥창은 조동포(潮東浦) 포구에 설치되었는데, 이전에는 신포(薪浦)라고 불리웠던 곳이다.

그런데 조동포 장흥창의 위치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고적 조에 간단한 기록이 전한다. “고장흥창(古長興倉)은 군(郡)[영암]에 있었으며, 고려 초기에 설치하여 인근 군·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한 12대 조창으로 지금은 토성(土城)의 터가 있다.”라고 하는 기록이 전부이다. 그런데 다른 고적들의 위치는 중심지인 읍에서 고적까지 떨어진 거리를 밝히고 있으나 장흥창은 별도로 거리를 명기하지 않고 재군(在郡)이라고만 하였다. 이로 보아 장흥창은 영암군의 소재지 인근임을 알 수 있다.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 마을이 장흥창의 소재지로 비정된다. 천 섬의 세곡을 싣을 수 있는 큰 배, 즉 초마선의 뱃길이 가능한 곳이고, 영암읍의 인근에서 흙으로 쌓은 토성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2. 조선 시대

조선 시대와 들어와 영암군은 세곡을 나주의 영산창에 납부하였으나 칠산 바다의 물길이 험하여 사고가 빈발하자 1512년(중종 7)에 나주 영산창이 폐쇄되고 영광 법성포창으로 이관되었다. 따라서 영암의 세곡도 법성포창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영암군에도 세곡창, 즉 해창이 설치되어 대동미 등을 실어 날랐다. 영암 해창영암읍 망호리 배널리 해창과 군서면 해창 두 곳에 있었다. 배널리 해창은 해저 퇴적으로 인하여 조운선의 뱃길이 어려워져 19세기 무렵에 군서면 해창으로 이동되었다.

[의의와 평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당시 조운로의 실태를 알 수 있다. “벼[元米], 콩[太], 대동미 등을 해마다 풍작 흉작에 따라 혹 더 걷거나 감하여 1월에 창고를 열어 2월까지 영암 해창에서 거두어 출발한 세곡선은 이진(梨津)[지금의 해남 북평이나 당시는 영암] 앞 바다를 거친 다음 우수영, 영광 법성, 충청도 원산 영종포를 거쳐서 한양의 광흥창에 도달하였는데, 총 20일이 소요되었다.” 여기에서 영암 세곡을 해창[영암 망호]에서 거두어들인 다음, 이후의 세곡선의 조운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세곡선은 영암 해창을 출발하여 이진으로 남행하였다가 다시 북행하여 한양으로 향한다. 기록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나 지리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다. 다시 말하면 영암 세곡선이 영암 해창에서 한양에서 더멀리 떨어진 이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또 육로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영암읍 망호 배널리 해창에서 거둔 세곡을 육로로 직선 약 47.4㎞나 남쪽으로 떨어진 해남의 이진까지 운반해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때는 해로가 길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물길이 매우 사나운 울돌목을 지나는 뱃길을 거쳐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보아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조운로는 기록자의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영암읍 망호 해창에서 배에 싣고 곧바로 서진(西進)하여 영산강을 따라 목포로 통하는 뱃길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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