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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31
한자 高麗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최연식

[정의]

고려의 건국에서부터 멸망[918~1392년]에 이르기까지 전라남도 영암군의 역사와 문화.

[개설]

현재의 영암군 지역에는 고려 시대에 영암군[영암읍·군서면·덕진면 지역], 곤미현(昆湄縣)[미암면·학산면·삼호면 지역], 야로현(野老縣)[금정면과 나주 세지면 지역], 반남현(潘南縣)[시종면과 나주 반남면 지역]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중 영암군은 지금의 전라남도 서남부 지역의 거점으로 성종 때인 995년(성종 14)에 낭주(朗州)로 개칭되고, 외곽 방어의 거점 중 하나인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

안남 도호부는 당시 전라남도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해양도(海陽道)에서 고을의 위상이 가장 높았다. 1012년(현종 3)에 안남 도호부가 고부(古阜)로, 1018년에는 전주로 옮겨가면서 다시 영암군으로 복구되었다. 당시 영암군은 곤미현을 비롯하여 주변의 황원군(黃原郡)[화원 반도], 도강군(道康郡)[강진군 북부], 해남현(海南縣)[해남 반도 서부], 죽산현(竹山縣)[해남군 마산면], 정안현(定安縣)[장흥군 관산읍], 수령현(遂寧縣)[장흥읍], 탐진현(耽津縣)[강진군 남부] 등의 속현과 다수의 향·소·부곡을 통할하는 대군(大郡)이었다. 한편 반남현과 야로현은 북쪽 나주목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시대의 영암군은 해남, 강진, 장흥 등의 연해 지역과 주변의 여러 섬을 총괄하는 서남해의 핵심 지역이었다. 수도 개경에서 영산강을 잇는 수로가 중시되면서 영산강과 직접 연결되는 영암이 주변 해안과 도서 지역의 창구로 기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영암군 읍치 가까이에는 영보역(永保驛)과 장흥창(長興倉)이 설치되어 육상과 해상 교통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덕진면 영보리에 있던 영보역은 남쪽의 강진, 장흥, 해남 지역과 북쪽의 나주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군서면 해창리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흥창은 영암군과 주변 여러 군현의 세곡을 모아 개경에 운송하는 해상 교통과 수송의 거점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영암군의 위상이 약간 저하되었다. 12세기 초 예종 비의 고향인 정안현에 감무가 파견되어 영암군에서 분리되었고, 얼마 후에는 정안현이 장흥부로 승격되면서 인접한 수령현과 탐진현도 그 속현으로 이관되었다. 12세기 후반에는 도강군에도 감무가 설치되어 영암에서 분리되었다. 영암군의 관할 지역은 영암과 해남 및 주변 도서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발하면서 조운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장흥창도 기능을 상실하여 폐지되었다.

[고려 건국과 영암의 역할]

영암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고려 초 왕실의 안정에 기여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함께 천문(天文)·복서(卜筮)에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던 최지몽(崔知夢)태조가 가장 가까이 하는 참모로서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고, 혜종 때에는 국왕의 신변 안전과 왕실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광종 때 구신(舊臣) 숙청 정책으로 일시 유배되었지만 경종 때에 재상으로 복귀한 후 성종 대까지 최고 원로로서 신왕조의 통치 체제 정비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선구자로서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와 후삼국 통일을 예언했다고 전해지는 도선(道詵)의 고향도 영암으로 일컬어졌다. 후고구려 말기 왕건을 위하여 궁예에게 희생되었던 선각 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역시 활동 지역으로 볼 때 영암 혹은 인근 지역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문이 마멸되어 출신 지역이 무주(武州) 관내라는 것밖에 확인되지 않지만 선각 대사가 출가한 장흥 보림사와 수행한 해남 두륜산은 모두 영암과 가까운 곳이었고, 산문을 개창하였던 월출산 무위사도 당시 영암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다른 시기에 비해 고려 시대 영암 지역의 위상이 특별히 높았던 배경에는 이와 같이 왕조의 개창과 왕실의 안정에 기여하였던 인물들을 배출한 지역이라는 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암의 고려 시대 유적]

영암에 전하는 고려 시대 유적은 대부분 불교와 관련된 것들이다. 영암읍 성풍사지는 고려 초기의 사찰 터인데, 현재 남아있는 영암 성풍사지 오층 석탑[보물 제1118호]에서 1009년(목종 12)에 호장 박문영(朴文英)이 석탑을 건립하였다는 탑지가 출토되었다. 월출산 북쪽의 도갑사에도 고려 시대에 제작된 석탑 영암 도갑사 오층 석탑[보물 제1433호]과 불상 영암 도갑사 석조 여래 좌상[보물 제89호]이 전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1090년(선종 7)에 건립된 장생석 3점이 남아 있다. 서호면 엄길리의 철암산 암벽에는 1344년(충목왕 1)에 지역민들이 조직한 미타계(彌陀契) 구성원들이 근처 갯벌에 매향한 사실을 기록한 암각이 전하고 있다. 한편 일본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의 쇼렌지[照蓮寺]에는 고미현[곤미현]의 서원(西院)에서 주조한 사실이 새겨져 있는 동종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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