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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15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집필자 최연식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라남도 영암군의 역사

[개설]

서남해 지역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영암은 바다와 강, 산이 어우러진 풍요로운 자연 환경과 내륙과 도서·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고대부터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고대에는 옹관 고분 문화권의 중심지였고, 고려 시대에는 주변의 8개 군현을 아우르는 지역 거점이었다. 조선 시대 이후 주변 지역이 분리되며 통할 영역은 축소되었지만 여러 사족 집안들이 정착하면서 고유한 양반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대 한일 교류의 상징인 왕인 박사와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선구자인 선각 국사 도선의 고향으로 유명하며, 월출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다. 군서면 구림(鳩林) 마을의 대동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동계(洞契)로 유명하다.

[선사]

영암군 지역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아직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청동기 시대부터는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천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또한 서호면 장천리에서 청동기 시대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적들에서는 한국식 동검 계통의 다양한 청동제 유물과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토기와 석제 용구들이 발견되었다.

초기 철기 시대에는 고인돌 대신 움무덤[토광묘(土壙墓)]과 독무덤[옹관묘(甕棺墓)]을 사용하였고, 3세기 후반부터는 대형 옹관 고분이 출현하였다. 대형 옹관 고분은 대부분 시종면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인접한 나주시 반남면 지역과 함께 삼한 시대 서남해 지역의 중심 소국 마한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종면의 고분 중에는 태간리자라봉 고분과 같은 전방후원분도 확인되었다.

[고대]

5세기 이후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영암 지역도 백제에 통합되었다. 백제 때 영암 지역에는 월나군(月奈郡)[영암읍·군서면·덕진면 지역],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시종면과 나주 반남면 지역], 고미현(古彌縣)[미암면·학산면·삼호읍 지역], 아로곡현(阿老谷縣)[금정면과 나주 세지면 지역] 등이 설치되었다. 영암 지역은 백제에 통합되면서 백제의 문화가 전파되었다. 5세기 후반 이후 백제 중앙부의 묘제인 돌방무덤[석실분]이 축조되기 시작하였고, 6세기 말에는 수덕사에서 수행하던 승려 혜현(慧顯)월출산으로 옮겨오면서 백제의 불교문화가 이 지역에 전파되었다. 백제에 통합되면서 일본과의 교류 거점으로 기능하였고,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에 유교 문화를 전한 왕인(王仁) 관련 전승들이 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 신라에서 영암은 무주(武州)의 관할에 들어갔고, 군현의 명칭도 영암군(靈巖郡)[달나군], 반남현(潘南縣)[반나부리현], 곤미현(昆湄縣)[고미현], 야로현(野老縣)[아로곡현]으로 바뀌었다. 영암군의 월출산은 국가의 중요 제사를 지내는 소사(小祀)의 하나가 되었는데, 월출산 천황봉의 제사터가 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 시기의 대표적 유적으로는 매향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군서면 서구림리영암 정원명 석비[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81호][786년]와 군서면 구림리영암 구림리 요지[사적 제338호]가 확인된다. 신라 말에 견훤이 후백제를 건설하면서 영암도 후백제의 영향권에 속하였지만 912년 후고구려가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를 장악함에 따라 영암도 후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들어와 영암은 서남해 지역의 거점으로 등장하였다. 성종 때에는 영암군을 낭주(朗州)로 개칭하고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여 전라남도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해양도(海陽道)의 중심 고을로 삼았다. 이는 수도 개경과 서남해 지역을 연결하는 지리적 중요성과 함께 고려 초 후삼국 통일과 왕실 안정에 기여했던 최지몽(崔知夢)의 출신 지역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이후 안남 도호부가 전주로 옮겨가면서 다시 영암군으로 복구되었지만 여전히 주변의 황원군, 도강군, 곤미현, 해남현, 죽산현, 정안현, 수령현, 탐진현 등의 속현과 여러 향, 소, 부곡을 통할하는 대군(大郡)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한편 영보역(永保驛)과 장흥창(長興倉)이 설치되어 육상과 해상 교통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12세기에 도강군에 감무가 설치되고 장흥부의 신설로 정안현, 수령현, 탐진현이 분리되며 규모가 축소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빈발하면서 장흥창도 기능을 상실하여 폐지되었다.

[조선 시대]

조선 초 행정 구역 개편으로 황원군, 해남현, 죽산현이 분리되고 곤미현은 영암군에 통합되었다. 또한 향·소·부곡이 폐지되면서 북평향[해남군 북평면]과 송지부곡[해남군 송지면] 등도 영암군에 통합되었다. 한편 해남군 옥천면·계곡면 일부와 강진군 성전면 일부, 보길도·소안도·추자도 등의 섬이 월경지로 속해 있었다. 영암 지역의 호(戶)와 인구 수는 조선 시대에 비로소 확인되는데, 조선 전기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333호와 1만 2229명, 조선 후기 자료인 『호구 총수』에는 8,214호와 2만 9288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영암에는 외지의 사족들이 정착하여 동족 마을을 형성해 갔다. 전주 최씨최덕지(崔德之)가 처가가 있던 덕진면 영보촌에 들어와 세거하였고, 최덕지와 혼인 관계를 맺은 거창 신씨(愼氏) 집안도 영보촌에 집거하였다. 역시 최덕지 집안과 혼인 관계가 있는 남평 문씨(文氏) 집안은 영보촌을 거쳐 읍내 장암에 정착하였다. 한편 군서면 구림촌에는 선산 임씨(林氏)와 난포 박씨, 함양 박씨가 정착하였고, 서호면 일대에는 김해 김씨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들 사족 가문이 군내 여러 지역에 자리잡으면서 성리학에 기초한 양반 문화가 발전하였다. 영암의 사족들은 을묘왜변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의병을 구성하여 외적을 막아내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구림영보, 장암 등의 지역에서 지역민들의 자치 조직인 동계(洞契)가 발전하였고, 군내 각지에 여러 서원과 사우들이 설립되었다. 이중 최덕지를 배향하며 조선 후기 노론의 중심 가문인 안동 김씨와 연결된 녹동 서원(鹿洞書院)은 영암의 대표적 서원으로 1713년(숙종 39)에 국가의 사액을 받았다.

[근대]

1895년(고종 32) 도서 지역을 신설된 완도군에 이관하고 대신 나주와 진도에 속해 있던 금정면시종면, 신북면 지역을 이관받았다. 또 1914년에는 해남과 강진 지역에 있던 월경지를 해당 군현에 이관하여 현재와 같은 영역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일부 면의 통합과 명칭 변경을 거쳐 11개 면으로 정리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이주민과 토착 지주에 의한 대규모 농장 경영이 활발하였다. 일제의 식량 증산 정책에 맞추어 영암(靈巖), 등중(藤中), 병두(兵頭), 하월(夏月), 전용(田用), 가등(加藤) 등의 일본인 농장과 학산면 출신의 현준호(玄俊鎬)가 설립한 학파(鶴坡) 농장이 발전하였다. 특히 학파 농장은 1930년대 이후 미암면군서면, 서호면 등지에서 대규모 간척 사업을 벌여 영암 지역 최대의 농장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이러한 대규모 농장 발전의 이면에서 대다수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화되면서 이에 저항하는 항일 운동이 발생하였다. 1908년 2월 박평남(朴平南)·신예교(辛禮敎) 등을 중심으로 6백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고, 3월에는 함평에서 온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1909년까지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1919년 4월 10일에는 조극환(曺克煥)을 중심으로 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소작민들이 농장주들의 횡포에 맞서 쟁의를 벌인 영보정 사건전남 운동 협의회 사건 등이 있었다.

[현대]

영암의 현대사는 좌우 대립의 상처가 깊다. 해방 직후 영암의 좌익은 조극환을 중심으로 건국 준비 위원회와 인민 위원회를 통해 1946년 초까지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1945년 11월 미군이 진주하면서 인민 위원회는 무력화되고 미군에 의한 행정이 이뤄졌다. 미군정이 좌익을 축출하고 우익 중심의 지배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격렬한 좌우대립은 6·25 전쟁 중 극심한 민간인 피해를 가져왔다.

영암은 교통로의 요지이면서 험준한 산줄기가 이어져 1946년 12월까지도 좌익 세력들이 일부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좌우익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번갈아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에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군서면 구림 마을의 경우 좌익과 우익을 넘어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공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진실을 밝히고 가해와 피해를 넘어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모범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암은 호남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이농 현상이 심화되었다. 1960년 당시 12만 3000명을 넘었던 인구는 1990년대에 이르러 6만여 명으로 축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1989년에 대불 국가 산업 단지[영암 테크노폴리스]가 지정 고시되어 1996년에 완공되었다. 대불 공단은 서해안 고속 도로의 개통과 기반 시설의 확충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삼호 중공업이 들어선 이후 조선 공업의 중심지로 지역 산업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대불 공단이 자리한 삼호면은 2003년에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현재는 군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왕인 박사 유적지월출산 국립 공원 등 문화 자원을 활용한 문화 관광 산업 또한 새로운 발전 동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2010년부터는 포뮬러 원 코리아 그랑프리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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