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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007
한자 高麗初期王室-守護者-崔知夢
이칭/별칭 최총진(崔聰進),민휴공(敏休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최연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907년 - 최지몽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980년 - 최지몽 유배에서 풀려나 내의령에 임명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982년 - 최지몽 좌집정 수내사령에 임명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987년 - 최지몽 사망

[정의]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고려 초기 왕실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던 영암 출신의 문신.

[개설]

최지몽(崔知夢)[907~987]은 영암 출신으로, 그의 학문을 높이 산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발탁되어 측근에서 보좌하며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다.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惠宗)정종(定宗) 등 후계 왕위 계승자들의 권력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왕위를 노리던 왕규(王規)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구신(舊臣) 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의 절대화를 추구하던 광종 대에 일시 지방으로 추방되었지만, 광종 사후 다시 중앙에 등장하여 재상으로서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를 주도하였다. 영암 출신 최지몽의 활약은 고려 초 영암의 지역적 위상 강화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려 태조의 일급 참모]

『고려사(高麗史)』 권92, 열전 제5에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후삼국 통일을 위해 기여한 여러 인물들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수록된 인물들 중 태조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며 최측근으로 활동한 인물로는 최지몽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최지몽태조와 처음 만난 것은 고려가 건국된 지 7년째 되는 924년이었다. 이때 최지몽의 나이는 불과 18세였지만 이미 학문적 소양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최지몽은 대광(大匡) 현일(玄一)의 문하에서 유교 경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배웠는데,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 즉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과 해석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날 일을 예측하는 데 뛰어났다. 태조는 이러한 최지몽의 명성을 듣고서 일부러 궁궐로 불러 자신의 꿈에 대해 해석해 보게 하였다. 태조의 꿈을 들은 최지몽은 그 자리에서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될 징조라고 하였고, 이에 크게 기뻐한 태조는 본래 총진(聰進)이던 이름을 지몽(知夢)으로 바꾸게 하고 자신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게 하였다.

태조최지몽을 측근으로 발탁한 것은 학문적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이지만 그와 동시에 최지몽 집안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태조는 일찍이 궁예(弓裔)의 휘하에 있을 때에 서남해 지역을 다스린 인연으로 이 지역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최지몽의 아버지 원보(元甫) 최상흔(崔相昕)도 왕건이 서남해 지역에 머물렀을 때 왕건과 연결되었고, 그러한 인연으로 고려 건국 직후에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태조최지몽을 등용한 이후 항상 가까이에 두고 그의 조언을 듣고자 하였다. 후백제를 정벌하러 출정할 때에도 잠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였고, 후삼국 통일을 달성한 후에도 항상 가까운 거리에 두고 자문을 받고자 하였다. 태조에게 있어서 최지몽은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일급 참모였던 것이다.

[고려 왕통의 수호자]

태조 사후에도 최지몽태조의 뜻을 받들어 고려 왕조의 왕통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태조가 죽고 맏아들 혜종이 즉위하였지만 세력 기반은 그다지 튼튼하지 못하였다. 혜종의 어머니는 나주 오씨(羅州吳氏)로 태조가 서남해 지역을 다스릴 때 혼인한 여인이었다. 나주 오씨는 나주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지만 고려 조정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하였기 때문에, 태조의 강력한 의지와 태조의 뜻을 받든 신하들의 노력으로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불안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태조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던 여러 지역의 세력가들은 혜종 대신 자신들의 소생을 왕위에 즉위시키기 위하여 경쟁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경기도 광주(廣州)에 기반을 두고 세력이 강하였던 왕규는 외손자를 즉위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 왕규는 처음엔 또 다른 딸을 혜종의 왕비로 들인 후 다른 왕자들, 특히 비교적 세력이 강한 청주 유씨(淸州兪氏)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하지만 혜종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자 왕규는 나아가 혜종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왕규혜종의 왕권을 위협할 때 최지몽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왕권을 수호하고자 노력하였다.

혜종 2년 왕규가 청주 유씨 소생 왕자들을 참소하였을 때 최지몽은 적극적으로 이에 반대하였다. 당시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과 대책을 관장하는 사천관(司天官)의 직임을 맡고 있던 최지몽은 “유성이 국왕을 상징하는 자미성(紫微星)을 침범하는 일이 일어났다.”라며 빗대어 간접적으로 왕규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혜종은 그 뜻을 받아들여 청주 유씨 소생의 왕자들을 비호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딸을 청주 유씨 소생의 왕자와 결혼시켜 서로 협력하고자 하였다. 이 일 이후 왕규혜종 암살을 시도하려 하자 최지몽은 사전에 이를 알아채고 혜종에게 알렸고, 혜종은 미리 대비하여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자손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던 왕규의 시도는 번번이 최지몽에 의하여 좌절되었고, 고려의 왕통은 안정적으로 계승될 수 있었다.

최지몽왕규의 시도를 견제하고 혜종최지몽의 건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배경에는 두 사람의 지역적 기반이 같다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나주와 영암을 각기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혜종최지몽 사이에 강한 연대 의식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광종 대의 시련]

혜종 사후 청주 유씨 소생의 왕자들이 연이어 왕위에 즉위하였다. 정종은 즉위 직후 왕규를 처형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데 공이 있는 최지몽을 우대하였다. 최지몽에 대한 우대는 다음 국왕인 광종(光宗) 대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광종 만년에 태조 대 이래의 구신들을 억압하고 신진 세력들을 중용하면서 최지몽도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970년(광종 21) 최지몽은 국왕이 임석한 귀법사(歸法寺) 연회에서 술에 취하여 예의를 잃었다는 이유로 먼 지역으로 쫓겨났다. 술에 취하여 예의를 잃었다는 것은 구실이고 실제로는 구신들을 숙청하려 한 광종의 의도에 희생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명예로운 노년]

먼 지역에 유배되어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최지몽광종의 뒤를 이은 경종(景宗) 대에 구신 숙청 정책이 철회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경종은 980년(경종 5)에 최지몽을 불러들여 재상급 관직인 내의령(內議令)에 임명하였다. 이미 70세를 넘은 고령이었지만 최지몽은 현역 관료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복귀 직후 자신의 천문(天文)에 관한 지식을 토대로 역모를 예측하였고, 실제로 역모 사건이 일어나면서 최지몽의 신망은 더욱 높아졌다.

경종을 이어 즉위한 성종(成宗)최지몽의 관직을 최고 관직인 좌집정(左執政) 수내사령(守內史令)으로 높여 주고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최지몽이 사직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하지 않고, 그 대신 조례 참석을 면제하는 특별 대우를 해 주었다.

987년(성종 6)에 최지몽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에도 성종은 직접 병문안을 하고 3,000명의 승려들에게 반승(飯僧)을 하며 특별 기도를 하게 하는 등 각별한 대우를 하였다. 또한 사후에는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증하고 민휴(敏休)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을 이루고, 이후 왕실의 왕통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한 최지몽의 공로를 인정하여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하였던 것이다.

[최지몽과 국암사]

현재 영암에는 최지몽과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1972년에 낭주 최씨(朗州崔氏) 문중의 주도로 그를 향사하는 사당인 국암사(國巖祠)가 건립되었다. 도선 국사의 탄생 전설이 깃든 국사암(國師巖) 옆에 자리한 이 사당에는 최지몽과 함께 조선 시대에 활약한 낭주 최씨 인물들이 배향되어 있다. 각기 승려와 유학자로서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던 도선 국사최지몽을 기리는 공간이 서로 인접하고 있어서 고려의 정신적 기원이 되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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