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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005
한자 國際浦口上臺浦-位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강봉룡이강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공원 상대포 역사 공원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지도보기

[정의]

신라 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에서 국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포구.

[개설]

상대포(上臺浦)는 예로부터 호남 3대 명촌으로 손꼽힌 영암 구림 마을에 있었던 옛 포구로, 백제 때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일본 등을 오가는 배들이 드나드는 국제 포구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 상대포는 각종 문물과 문화가 활발히 교류하는 국제 포구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이는 상대포 가까이에 청해진이 설치되어 장보고의 해상 무역이 왕성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구림 마을이 오래전부터 도기 생산의 중심지였던 것도 상대포와 무관하지 않다. 국제 포구인 상대포를 통하여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구림 마을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전통적인 도기 제작 기술에도 변화를 불러와 시유(施釉) 도기의 유입을 촉진하였다. 이는 구림 마을상대포가 국내외의 도기 생산과 유통의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였다.

2013년 현재, 상대포는 일제 강점기의 서호강 간척 사업과 1970~1980년대 사이에 진행된 영산강 하굿둑 공사로 물길이 막혔기에, 이제는 바다와 이어진 포구가 아니다.

[문헌을 통하여 본 상대포]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의 「팔도 총론」 전라도 편에서 구림 마을 상대포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구림은 신라 시대부터 명촌이었다. 이곳에는 상선과 사신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입하였을 정도로 성황을 누린 국제 포구가 있었다. 이 포구에서 흑산도와 홍도, 가거도를 거쳐 중국 영파에 이르는 바닷길이 있었다. 바닷길의 여정은 구림에서 흑산도까지 하루, 흑산도에서 홍도까지 하루, 홍도에서 가거도까지 하루, 가거도에서 영파까지 사흘 정도 걸리는데, 동북풍의 순풍을 만나면 하루 만에 주파할 수도 있다. 신라 말엽에서 고려 초엽 사이에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 등이 구림의 포구에서 상선에 편승하여 이 바닷길을 통해 중국에 건너가서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였다.”

『택리지(擇里志)』는 18세기 중엽에 저술된 지리서이기에 신라와 고려 시대의 사정을 전하는 이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지표들이 구림 마을에서 확인되고 있어, 『택리지』에서 묘사한 국제 포구 상대포의 위상을 사실로 받아들일 만하다.

[문물의 생산과 집산 - 상대포와 도기]

전라남도 영암군의 구림 마을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유 도기 생산지이자 최대의 도기 생산지였다는 사실은 구림 마을에 있었던 상대포가 국제 포구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기란 일반적으로 800~1100°C의 소성 온도에서 구워 내는 그릇으로, 800°C 이하에서 굽는 토기와 1200°C 이상에서 구워 내는 자기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자기의 생산 기술은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중국으로부터 이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도기의 생산은 우리나라가 자체로 개발한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구림 마을에서 발굴된 도기 가마터는 10여 곳에 이르고, 대개 7~10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당시 구림 마을이 도기의 최대 생산지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국제 포구 상대포가 국내외 도기 생산과 유통의 거점이었음을 반영한다.

전라남도 영암군은 이러한 구림 도기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자 1999년에 구림 마을에 영암 도기 문화 센터를 개설하여 옛 도기 제작 기술을 고증·연구하면서 제작과 전시, 판매도 병행하는 기념관으로 활용하였다. 영암 도기 문화 센터는 2009년부터 공립 박물관으로 등록하여 ‘영암 도기 박물관’으로 새로이 개관하였다.

[상대포와 인물]

상대포와 관련된 인물로는 우선 백제의 학문과 문화를 일본에 전한 왕인(王仁)[?~?] 박사, 통일 신라 때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857~?]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모두 국제 포구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목적지로 출발했다.

특히 한창 국제 포구로서 기능을 하던 통일 신라 시대에서 고려 시대 사이에는 많은 인물이 구림 마을에서 배출되었는데, 이 인물들도 외부 문화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국제 포구 상대포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그중 첫 번째로 꼽을 인물은 826년에 구림 마을에서 태어난 선각 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827~898]이다. 도선은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桐裏山門)[신라 때 선종 불교의 하나]과 인연을 맺은 이후에 선종 승려이자 풍수지리의 대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도선은 고려 태조(太祖)왕건(王建)[877~?]의 아버지 용건(龍建)과는 고려 건국 이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다. 왕건이 후손에 전한 정치 지침서인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2조에는 도선이 지목한 곳에만 사원을 짓게 하라는 유언이 남아 있을 정도로 도선의 의견을 중시하였다. 이후 현종도선에게 대선사의 존호를 내렸고 숙종은 왕사의 시호를 더하였으며, 인종선각 국사를 추봉하였고 의종최유청에게 명하여 그의 비문을 찬술하게 하였다. 이처럼 도선은 역대 고려 왕조의 정신적 지주로 숭앙을 받았다.

그다음 인물로는 최지몽(崔知夢)을 꼽을 수 있다. 원래 이름이 최총진(崔聰進)이었던 최지몽은 영암 지역으로 출사해 온 왕건의 꿈을 해몽한 인연 덕분에, 왕건으로부터 지몽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개명하였다. 인품이 온화하고 총명하였으며 여러 학문 분야에 통달하여 항상 왕건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참모가 되었다. 고려 건국 이후 태조는 물론이고 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의 6대에 걸쳐 총애를 받으면서 최고 재상의 직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 최지몽은 고려 초기 왕조의 기틀을 집대성한 일등 공신의 반열에 들기에 합당하다.

이렇듯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고려의 건국과 수성의 과정에서 정신적 지주로서 당대를 주름잡고 세상을 경영하는 인물로서 역할을 다했던 도선최지몽이 구림 출신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당시 구림 마을에 동아시아의 문물과 문화가 모여들어 교류하던 국제 포구 상대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포의 해양 신앙]

항상 위험한 항해에 직면해야 했던 뱃사람들에게 신앙이란 필수불가결한 심리적인 보험과도 같다. 이러한 해양 신앙은 하나의 신앙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앙에 의존했던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국제 포구 상대포가 있었던 구림 마을에서 다양한 해양 신앙의 편린들이 확인되는 것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상대포와 관련한 대표적 신앙은 매향 신앙이다. 매향 신앙이란 향을 강이나 바다에 묻는 의식인 매향(埋香)의 신통력을 통하여 불력(佛力)의 보호를 이끌어 내고자 거행하는 신앙 행위이다. 주로 바닷가나 섬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뱃사람들의 안전과 행운을 기원하는 해양 신앙의 일종으로 파악하고 있다. 구림 마을에서는 매향 의식을 거행하고 나서 이를 기념하려고 세운 매향비가 발견되었는데, ‘정원(貞元) 2년’이라고 새겨져 있어 신라 때 786년(원성왕 2년)에 세워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발견된 다른 매향비는 모두 고려나 조선 시대의 것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구림의 것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향비에 해당한다. 매향 신앙에는 해상 활동의 안전을 기원하는 해양 신앙의 성격이 있고 매향비의 건립 시기도 『택리지』에서 국제 포구의 위상을 떨쳤다고 전하는 통일 신라 시대에 해당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매향비는 구림 마을 상대포와 연관된 해양 신상(神像)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에 있는 제사 터도 상대포의 해양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제사 용기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말 모조품이다. 철로 만든 철마(鐵馬)를 비롯하여 흙으로 구워서 만든 토마(土馬)·도자마(陶瓷馬)·기와마 등으로 그 종류와 수가 다양하고 많다. 이 중에서 철마가 주류를 이루므로, 말 모조품을 통해 행하던 신앙을 흔히 ‘철마 신앙’이라 부르곤 한다. 이는 철마를 통하여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간과 하늘을 연결해 준다는 ‘천마(天馬)’의 발상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인다.

천황봉 제사 터는 구림의 상대포를 오가던 뱃사람들이 철마를 지니고 산에 올라가 하늘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철마 신앙 의식을 치렀던 현장이다. 최고봉인 천황봉에 올라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철마 신앙을 봉행했던 점으로 볼 때,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던 이들의 간절함이 해양 신앙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비둘기의 숲’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구림(鳩林)’이라는 지명 역시 소도 신앙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경주의 반월성 옆에 신라의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났다는 계림(鷄林)이 있다.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알지는 큰 광명이 내려 비치고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중에 이곳 계림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황금 궤에서 알로 발견되었다. ‘닭의 숲’이라는 뜻의 계림이 ‘시원적인 숲’이라는 뜻의 ‘시림(始林)’, 또는 ‘비둘기의 숲’이라는 뜻의 ‘구림(鳩林)’이라고도 불렸다는 점으로 보아, ‘김씨의 시조가 새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성스런 숲’으로 숭앙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대신에 ‘계림’이 또 하나의 국호로 칭해졌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하늘의 신인(神人)이 새의 도움을 받아 나무를 통해 하강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으로, 마침내는 나무 꼭대기에 새의 형상을 얹혀 놓고 숭앙하는 소도 신앙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구림’이라는 지명은 상대포의 뱃사람들이 소도 신앙에 의지하고자 했던 간절한 해양 신앙의 일면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험난한 바다와 싸우며 목숨을 걸고 항해해야 했던 뱃사람들은 하나의 신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양한 신앙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면 구림에서 매향 신상·철마 신앙·소도 신앙 등 다양한 신앙이 확인된다는 점이야말로 달리 생각하면 『택리지』에 전하는 대로 한창 성황을 이룬 국제 포구 상대포에서 험한 바닷길에 생계를 건 뱃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 주는 지표라 하겠다.

[상대포의 추억]

월출산영산강[영암천]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 곧 뒤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과 접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고, 특히 ‘달이 뜨는 산’ 월출산으로부터 떠오르는 달을 가장 선명히 바라볼 수 있는 서쪽 기슭에 있기에 구림 마을에 국제 포구가 자리 잡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상적인 월출산의 형상이 당시의 항해자들로서는 구림 상대포를 찾아가는 최상의 자연 표지물로 활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림의 앞바다는 1944년부터 시작하여 1961년에 완료된 간척 사업 때문에 거대한 평야[학파 농장]로 변모하여 지금은 옛 포구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전라남도 영암군은 상대포를 기념하는 정자를 건립하고 상대포 역사 공원을 새로 단장하는 등 상대포의 옛 경관과 역사를 복원하여 한때 전성기를 누리던 국제 포구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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